인간의 맛 일상

 이제서야 중용을 읽다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도올 선생의 '인간의 맛'은 고문古文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인해 가질 수 있는 편견이 생기지 않도록 풀이되어 있는 듯 하다. 

 중용을 읽으면서 우리 세대가 가진, 내 스스로가 가진 문제들이 엿보이는 것 같아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기도 했다. 서구적인 생활양식과 의식이 본래 내재되어 있던 동양적 사고방식과 혼재되어 뒤틀린 것이 현실적인 문제점이 아닌가 하기도 하였다.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며 유교사상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그 문제점들이란 것들이 유교에서 나왔다고 단정지어 말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유교가 잘난 사람들의 오만,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모습으로만 비추어졌다면 그 또한 단면적인 부분만을 바라본 것으로 군자가 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용의 참 뜻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나는 여지껏 얼마나 편협했는가. 그에 대한 물음에 스스로 답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고쳐나가야할 노력도 많아야 할 것이지만은 결국은 誠이 聖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럼 없이 자신에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강준만씨가 진중권을 논할 때 '텍스트주의자'라고 비판한 것이나 진중권이 '나꼼수'를 비판하는 것이 옳고 그름의 시각에서 볼 것이 아니라 言과 行이 합일하는 그 가운데 지점에 위치해야 하는 것도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예컨데 이명박 대통령의 손녀가 값비싼 몽클레어 패딩을 입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입는 것 자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명박 대통령의 '뼛속까지 서민'이라는 그 서민 행보에 따르면 현재의 그 모습들이 단순한 가식에 지나지 않는, 언행이 불일치하는 자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으로 여길 수 밖에 없다.

 이는 대한 반론으로 몇몇 진보인사들의 사적인 씀씀이를 언급하는 이도 있을 수 있으나 이명박 대통령의 건과 다른 점이라면 그것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려하거나 서민들을 기만하는 행위가 아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 옷 입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리까. 허나 그 이면에 '정성'없이 '성인'처럼 보이려는 자가 서있다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정성. 그것만이 仁으로 가는 人으로 사는 길일 것이다. 정초부터 도올 선생덕에 많은 깨침이 있어 좋다. 자사와 공자의 가르침이기도 할 것이다. 

 올해는 책을 많이 읽기보다 고전을 탐독하여야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겉핥기로나마 사서오경을 다 읽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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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날씨는 너무도 추워서 감정기복

나이는 먹는데 양심은 벗는다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아도 
먹고 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다며
남의 낯도 부끄럽게 
훌훌 벗어던진 
그 옷자락을 나는 탐한다

뱀처럼 똬리 튼 
순수한 허물의 피 움켜쥐며 
얻으려는 마음의 영생을,
내일 죽어도 
한치의 아쉬움도 없을, 
그 뜨거움을 나는 논한다

거리에 벌거벗은 사람들이
제각각 아름다움에 취해
밝게 빛나건만
나는 그 옷자락을 탐하여
두껍게 껴 입을 요량이다
이 겨울날씨는 너무도 추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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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쥐를 움켜진 올빼미 보고 읽고 쓰고

 어떤 단체에서 감투를 쓰거나 완장을 차면 갑자기 자신의 인격을 신격으로 착각하고 안파무인으로 설쳐대는 속물들이 있다. 그들은 감투나 완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친구나 부모를 배반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같은 무리 중에서 자기보다 주목 받는 존재가 나타나면 중상과 모략을 일삼는 특성도 보인다. 장자는 그런 부류들을 '썩은 쥐를 움켜진 올빼미'라고 표현했다.

 - 이외수 '하악 하악'



 감투와 완장을 써야만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다는 것도 참 슬픈 일이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알량한 자존심뿐인데 덧붙여 기워입은 옷들이 마음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권위가 만들어내는 그 껄끄러움이란 이루말할 수 없다. 마음으로 인정 받는 권위라는 것은 인격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인격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정치인들의 사사로운 인격이 신격으로 착각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도 그에 기인한다. 그들은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자신들을 뽑아준 유권자들을 농락하는 행동들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친구나 부모를 배반하는 일과 크게 다른 일일까.

 무리 중에 자신보다 주목 받는 존재가 나타나면 그 사사로움에 사로잡혀 중상모략을 일삼는다. 장자는 그런 부류들을 '썩은 쥐를 움켜진 올빼미'라고 표현했다는데 그들이 단 금뺏지야말로 썩은 쥐가 아닌가.

 그 허무한 권위가 내게 존재할리는 만무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생기는 그것을 내려놓고자 나는 자아에 대한 성찰을 곱씹어야 하겠다. 지나온 날들의 내 행동들이 분명 옳은 선택만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기에.

 그들에게 배반당한 역사를 통해 내가 이룩해야 할 것은 오로지 나의 것. 오롯이 내가 되는 길이다. 헐거운 감투와 완장으로 남을 눌러가며 얻을 것이 지리멸렬한 마음의 땅이라면 더욱이.

 '진보의 미래'를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사고 방식을 다시금 바라보면서 남을 밟고 올라서면 과연 무엇이 보일까. 

 아, 남에게 받는 인정에 궁핍하기보다 나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으로 나를 밟고 일어서야겠다. 그래도 굳이 남을 밟고 올라서겠다면 나를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진보든 보수든 간에 남과 함께 하려는 마음가짐이 돋보이길 원한다. 허나 경제체제의 탓인지 남을 밟고 올라서려는 것은 진보나 보수나 매한가지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애망은 존재하지만 다시금 되내이는 것은 나를 즈려 밟고 올라서시라 사뿐히 속삭이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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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절(一切)의 질병(疾病)은 숙식(宿食)을 근본으로 한다 보고 읽고 쓰고

 '일절(一切)의 질병(疾病)은 숙식(宿食)을 근본으로 한다.' 

 
 과식에 쉽게 무너지는 나에게 석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몸과 마음에 담겨져 있는 일절의 질병이 숙식을 그 근본으로 함으로 욕심부리지 말고 적당히 먹으라고.

 쉽지 않은 일이다. 식탐을 줄인다는 것은 당연히 쉽지도 않거니와 본능적으로 꺼려지기도 한다. 허나 가끔 그 욕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이다. 

 2006년, 군입대 전의 나는 일주일 간 오렌지 주스 따위의 음료만 마시면서 단식을 했던 경험이 있다. 이틀에서 삼일째 되는 날까지는 굶주림에 괴로웠지만 날이 지날수록 정신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도중에 그만두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사실 누구나 과식보다는 소식이 몸에 좋다는 걸 알고 있지만 지키기가 힘들 뿐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려는 하나의 방편은 낮밥을 먹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점심이라고 부르는 이것의 본디 뜻과 유래를 보면 중국(中國) 남송(南宋) 때에 한세충(韓世忠)이라는 장군의 아내였던 양홍옥(梁紅玉)의 얘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나라와 전쟁 중 양홍옥은 손수 만두를 빚어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양이 적어 “만두의 양이 많지 않으니까 마음(心)에 점(點)이나 찍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것이 점심(點心)의 유래라 한다.

 현대인의 활동량이 옛 선조들만 할까. 그보다 적은 활동량을 가졌을 법한 내가 삼시 세끼를 다 챙기는 것이 우습기도 하거니와 법정스님의 하루에 두끼만 먹어도 족하다는 말씀에 낮밥을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입 안에는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는 말씀도 그러한 맥락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배가 불러서" 그렇다는 말도 허투루 들을 말이 아닌 듯 싶기도 하다.

 점심을 먹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살을 빼거나', '돈을 아끼거나'의 목적만 있는 줄로 알지만 이 장황한 이야기를 어찌 다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말해줘도 조소를 금치 못하는 이도 있는 판국에.

 남이 어찌 생각하든 간에 조석을 든든히하고 점심을 간단히하는 버릇을 길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에 점을 찍으며 살겠다는 소리이지, 조반까지 챙겨가며 옛것을 되돌려 살겠다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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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문학 2012년 1,2월 24호 발자욱


 신작시 '공안정국', '낙서를 하고 싶으다' 수록되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공안정국'에 대해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에 미술학원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미술시간에 하늘을 검은 크레파스로 칠해버린 저를 본 담임 선생님은 '심성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왜 검게 칠했냐'며 다시 그릴 것을 종용慫慂했지요.

 그녀가 본 하늘과 어린 제가 보았던 하늘이 같은 하늘이었음에도 다르게 그린 이유는 그 시각 차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시각이 획일화 된 시선으로 재단된 것에 대해 미술 학원 선생님은 그럴수도 있다며 이해해줬던 것을 기억합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녀가 재단한 것들이 하나 둘 이해가 될 무렵에도 하늘은 무척이나 캄캄하게만 보였습니다. 90년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 없이 흘러가는 사회의 모습들, 신문을 보면 데자뷰인 것처럼 느껴지는 기사들. 모든 것이 검은 크레파스로 칠해놓은 것 마냥 어둡기만 합니다. 

 그래도 골판지에 하늘을 그리면서 꿈꾸는 것은 쓴웃음과 굴욕과 불면에 대한 불안이나 패배감이 아니라 지금도 검게 칠한 이 하늘이 언젠가는 밝은 빛으로 덧칠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녀를 만나게 되면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녀는 저에게 하늘이 밝다고 말하려나요. 

 


'낙서를 하고 싶으다'에 대해


 무심코 잡아 끌고 미는 손잡이를 보면서 참 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여운 손잡이를 힘주어 밀고 당기건만 그 힘 속에 희망도 사랑도 웃음도 죽어있는 듯한 표정으로 떠밀려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그속에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습니다. 

 어느 관광명소에 가도 낙서가 널려있습니다. 그 낙서들에 가까이 다가서 찬찬히 살펴보면 죽어있는 줄로만 알았던 사랑도 희망도 웃음도 남모르게 피어있어 짐짓 웃음이 납니다.

 그 낙서들에 담겨있는 몽글몽글한 사랑이 오늘 맞잡은 차가운 손잡이에도 깃들길 바라봅니다. 친구에게도 연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우리의 손은 또 다른 손잡이가 되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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